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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6년 이명주님 한라산 등정 일지

1추남 2007. 9. 4. 18:32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등정


▲ 백록을 타고다니는 신선이 사슴에게 물을 먹이려 들른다는 백록담
ⓒ2006 이명주


 
▲ 붉은 빛을 띈 키큰 주목군락이 펼쳐지다가...
ⓒ2006 이명주

11시간의 항해 끝에 제주연안부두에 닻을 내렸다. 두어 시간 선잠에도 불구하고 육지에 닿은 안도감과 처음 만나는 제주 풍경에 설레임이 일었다. 대합실에 들어서니 한라산 산행팀을 이끌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이번 여행은 저렴한 3박 2일 코스의 여행사 패키지상품을 구입했다. 교통비를 절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혼자 다니는 여행에만 익숙한 나로서는 이번 여정에서 가장 낯선 요소로 작용할 듯싶다. 다소 걱정이 되지만 단체 일정이 끝나는 이틀 동안 열심히 적응해볼 작정이다.

개인 연락망이 전혀 없는 터라 두리번거리며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가이드는 나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이틀간 한 팀이 될 십여 명의 사람들과 관광버스를 타고 신제주에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오늘(6일) 일정은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부터 한라산 등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I wanna walk my country's road"

숙소에 도착해 산행 준비와 아침 식사를 위한 한 시간이 주어졌다. 기대보다 허름한 숙소였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씻고 나와 방 한쪽에 말끔히 개놓은 이부자리에 잠시 기댄다는 것이 잠이 들어버렸다. 카운터에서 전화가 와서 깨어보니 정해진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내려와 밥을 먹고 나왔더니 다른 일행들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나보다 서네 살 어려 보이는 청년 한 명을 빼면 다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과 외국인 부부 한 쌍이 팀의 구성원이었다. 숙소 주인이 승합차로 한라산 성판악 코스 입구까지 안내해주었고 점심으로 도시락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오후 5시까지 같은 자리에서 모이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구애받는 것이 없어 다행이라 여겼다. 일행인 아저씨 네 분이 혼자 왔냐며 자신들만 따라 다니라 했지만 간간이 말동무가 된 건 외국인 부부였다. 외국어를 배운 건 십 년 전이요, 다른 이들처럼 어학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니 고등학교 때 배운 인삿말도 가물가물한 수준이지만 얼굴에 철판 한 장 깔면 웬만한 데선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제주도에 온 건 피차 처음이고 남편은 네덜란드인, 부인은 홍콩 사람이라고 했다. 등반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부분은 웃음으로 격려의 말을 대신했다. 산에서는 낯선 사람이라도 가벼운 인사나 눈웃음 한번으로 마음이 전해진다. 같은 산, 같은 길을 걷는 사람간의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그들과 나눈 가장 긴 대화는 "왜 혼자 여행을 하느냐"는 부인의 물음에 "Because I wanna walk my country's road(내 나라의 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요)" 란 답변이었다. 더 이상의 영어 표현도 어려웠지만 누군가 한국말로 물었어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싶었다.

해발 1950m, 한라산 정상을 향해

▲ 이곳을 오르며 삼순이는 삼돌이를 잊겠다며 울부짖었더랬다.
ⓒ2006 이명주


▲ 드디어 해발 1950m 한라산 정상
ⓒ2006 이명주


 
▲ 산사람들의 갈증을 '사∼악' 가시게 해준다 하여 '사라악'이 아닐까
ⓒ2006 이명주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은 지질학상 신생대 제4기에 화산분출로 생성된 휴화산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인지 전혀 감 잡을 수 없는 30만 년이라는 세월 전에 첫 화산활동이 시작되어 10만 년 전까지 3단계에 거쳐 한라산체가 솟아올랐다.

그 후 10만 년에서 2만5천 년 사이에 기생화산들이 분출하였고, 2만5천 년 전의 마지막 대폭발로 백록담과 제주도 해안선이 완성되었다.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산임을 증명하듯 여느 산과는 달리 한라산의 길은 흙이 아니라 몇 십만 년 전 흘러내리다 굳은 현무암 덩어리였다. 돌들은 오래 전의 폭발을 기억하는 듯 아직도 꺼멓게 그을려 있어 새삼 아직 식지 않은 용암이 발 밑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마저 들었다.

정상부를 기점으로 동서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한라산은 성판악 코스를 포함하는 남사면과 북사면의 기후대 분포가 다르다. 이 때문에 저지대의 난대성 식물에서 고지대의 한대성·고산식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여 종의 식물이 명확하게 구분을 지어 자라고 있다고 한다.

갖가지 식물을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산이 높아질수록 숲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짐은 알 수 있었다. 붉은 빛을 띤 키 큰 주목군락이 펼쳐지다가 잎이 풍성한 낮은 키의 숲이 나타났다가, 또 다른 느낌의 숲이 이어져 마치 저희끼리 동네를 이루고 사는 듯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험한 산은 처음"이라며 힘겨워했지만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을 거쳐 한라산에 이른 나로서는 그닥 힘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험한 산을 먼저 오른 것이 그보다 덜한 길을 걷는데 맘 적인 부담감을 덜어주는 듯도 했다. 사람살이에도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을 먼저 맞닥뜨리는 것이 지혜로운 대처법이 아닌가 싶었다.

한라산 정상에 이르기 전 마지막 약수터인 '사라악 약수터'에서 생수병에 물을 채우고 한 바가지 가득 물을 받아 마셨다. 검증된 바는 없지만 산사람들의 갈증을 '사∼악' 가시게 해준다 하여 '사라악'이 아닐까 마음대로 추측해보았다.

드디어 해발 1500m에 자리한 진달래 밭에 도착했다. 7월이라 흐드러지게 펼쳐진 진달래 밭을 볼 순 없었지만 한라산 정상이 멀지 않은 듯 갑작스레 사방에 펼쳐지는 안개가 신비스러웠다. 진달래 밭 쉼터에서 산 아래서 나눠 받은 도시락을 꺼내먹었다. 혼자면 어떻고, 비에 젖어 후줄근하면 어떠하리! 산에서 먹는 도시락 맛은 어느 꿀맛보다 일품이었다.

정상까지 마지막 450m. 진달래 밭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시야가 탁 트이더니 사방에 초원이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백여 마리의 양떼가 몰려오거나 새끼 조랑말이 뛰어다닐 것만 같은 신선한 풍경이었다. 풍경이 왠지 익숙하다 싶더니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삼순이'의 촬영지였다. 이곳을 오르며 삼순이는 삼돌이를 잊겠다며 울부짖었더랬다. 그러나 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잊기는커녕 실은 더 그리웠을 듯싶다.

나올 듯 나올 듯 뜸을 들이던 백록담이 드디어 나타났다. 수도 없이 텔레비전에서, 책에서 보았던 풍경이지만 실제로 본 백록담은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신성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사슴에게 물을 먹이려 들른다는 백록담은 오묘한 물색과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하얀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났다를 반복하며 그 신비함을 더했다. 긴 시간 끈질기게 오른 산의 정상은 언제나 오른 이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듯하다. 한동안 미동도 않고 선 채로 한라산 정상의 풍경을 가슴에 새겼다.

 

▲ 해발 1500m에 자리한 진달래밭 쉼터
ⓒ2006 이명주

출처 : 세계의 제주 CHjeju
글쓴이 : 제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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